1. 예언자 무함마드 : 이슬람의 창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40세가 되던 610년 라마단달(이슬람력 9월)의 어느날 밤 히라(Hira)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는다. 가브리엘은 무함마드에게 세 차례에 걸쳐 “읽으라!”라고 명령했는데,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이 아랍어로 “읽기”와 “낭송”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무슬림들의 신앙에 따르면 꾸란은 신이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계시를 담고 있는 책을 의미한다.
초기 예언자 시절, 무함마드는 자신의 가족을 포함하여 보다 넓은 주변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주도했던 새로운 이념과 운동은 메카 지배 가문의 의혹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예언자와 그의 가르침을 기존의 종교질서와 물질적 질서 그리고 자신들의 특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나날이 심해지는 압력과 박해 속에서, 무함마드는 622년에 메카에서 북쪽으로 351킬로미터 떨어진 야스리브로부터 온 사절들과 협정을 맺어 추종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의 메카에서 야스리브로의 이주를 아랍어로 히즈라(Hijra 또는 헤지라[Hejira])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이주’이다. 무슬림들은 이것을 무함마드의 예언자로서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간주한다. 후일 이슬람력이 정립되었을 때, 히즈라가 일어났던 해를 그 시작으로 했다. 그리하여 야스리브는 이슬람 신앙과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야스리브는 어느 때인가부터 단순히 도시를 의미하는 ‘알-마디나(Al-Madina)’(즉 메니다)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 공동체는 ‘움마(Umma)’라고 불리게 되었다. 얼마 안 가서 메디나의 새로운 이슬람 체제는 우상을 숭배하는 메카의 통치자들과 전쟁에 돌입했고, 8년간의 지속된 투쟁 끝에 메카를 함락시켰다.
무함마드의 업적과 전대(前代) 사도들인 모세와 예수의 업적 사이에는 그들의 추종자들이 묘사한 대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모세와 예수는 생전에 실패와 박해의 삶을 면치 못했으나 무함마드는 그의 약속된 땅을 정복하고 생존시에 이미 정치적 권위와 예언자의 권위를 활용하면서 지상에서 승리와 힘을 성취했다. 신의 사도로서 그는 종교적인 계시를 전달하고 가르쳤다. 동시에 그는 무슬림 움마의 지도자로서 법령을 공포하고, 정의를 다루고, 세금을 징수하고, 외교를 행하고, 전쟁을 하고, 평화를 이루기도 했다. 공동체로 출발한 움마는 국가가 되었고, 곧 제국으로 발전했다.
632년 6월 8일 예언자가 목숨을 거둠으로써 그의 예언자적 임무는 완성되었다. 무슬림들에게 그의 사도로서의 임무는, 앞선 예언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졌으나 포기되고 왜곡되어왔던 진정한 유일신 신앙을 회복하고, 우상을 타파하고, 신의 마지막 계시를 전달하고, 참신앙과 성법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무슬림들의 신앙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예언자, 즉 예언자의 봉인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류를 위하여 신이 의도한 계시는 충족되었다. 그 이후로 어떤 예언자나 더 이상의 계시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영적 목표는 달성되었고, 영적 기능은 끝을 맺었다. 다만 성법을 보호하고 유지하여 그것을 전세계로 전파하는 종교적 기능은 살아남았다. 그러한 기능의 효율적인 이행을 위해서는 국가 내에서의 지속적인 정치력과 군사력의 사용 ― 즉 주권 ― 이 필요하게 되었다(이슬람 제국의 탄생 암시 - 발제자).
이슬람 공동체와 국가 수뇌의 사망은 새로운 지도자의 선출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긴급 상황에서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가장 초기의 개종자이며 가장 존경받던 아부 바크르라는 인물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옹립했다. 역사적 전승에 따라 그가 지도자로서 사용한 칭호는 “칼리파(Khalifa)”(칼리프)였다. 약간 애매하기는 하지만, 아랍어 단어인 칼리파는 후계자와 대리자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아부 바크르가 등극했을 당시, 그 자신이나 그를 선출한 사람들 모두 칼리파에 대한 어떤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이 즉흥적인 조치로 칼리프 제도라는 위대한 기구를 마련했고, 그것은 이슬람 세계 최고의 통수기구가 되었다.
2. 이슬람 제국
이슬람 역사가들에 의하면, 예언자가 사망했을 때 그가 창시한 종교는 여전히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그 종교를 전해준 아랍인들도 거의 그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아마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변경으로 일부 확대된 정도였을 것이다.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주변의 광대한 지역, 후일 이슬람을 구성하게 된 지역, 칼리프의 통치권역, 오늘날 아랍 세계로 불리는 지역은 당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다른 종교를 믿고 있었으며, 다른 통치자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죽은 지 거의 1세기만에 그 지역 전체가 개조되었고,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하고 극적인 대변화를 맞이했다. 7세기 후반에 이르러 외부세계는 한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세력의 성장을 확인하게 된다. 칼리프의 이슬람 제국은 동쪽으로는 아시아의 인도와 중국의 경계를 지나갔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부 해안선을 따라서 대서양에 다다랐으며,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흑인의 땅으로, 북쪽으로는 유럽 백인의 땅으로 확장되었다. 이 제국 내에서 이슬람은 국교가 되었고, 아랍어는 급격히 다른 언어를 대체하여 공공생활의 주된 언어가 되었다.
이슬람 시대가 개막된 후 14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 칼리프가 통치하던 아랍 제국은 오래 전에 소멸되었다. 그러나 서쪽의 유럽과 동쪽의 이란과 중앙아시아를 제외하고, 아랍인이 정복했던 모든 지역에는 형태는 다르지만 구어체 아랍어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남게 되었고, 문어체 아랍어는 상업, 문화, 정부의 주된 소통도구가 되었다. 경전과 신학, 성법의 종교언어로서 아랍어는 아랍어 상용 지역을 훨씬 넘어서, 아랍의 지배를 결코 경험하지 못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슬람은 정복에 의해서 전파되었다고 종종 말해진다. 그러나 비록 이슬람의 전파가 상당 부분 정복과 식민화의 과정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해도, 이러한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정복자들이 전쟁을 수행한 주된 목적은 이슬람 신앙을 무력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점에 대해서 꾸란의 입장은 명백하다.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라.”(2:256) 피정복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할 경우의 낮은 세율과 같은 여러 가지 혜택을 포기해야 했지만, 개종을 강요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기 아랍 정복자들은 비아랍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를 채택했음에도, 아랍인과 비아랍인 사이에 엄격한 사회적 장벽을 유지했다. 그들은 아랍 여성과 비아랍 남성 간의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반대의 경우는 가능했다), 새로운 무슬림들에게 자신들과의 완전한 사회, 경제적, 정치적 동등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은 비아랍 개종자, 특히 페르시아인들의 불만을 샀고, 결과적으로 무슬림 지배의 광대하고도 급속한 확장이 초래하는 자연스러운 긴장과 함께, 국가와 제국을 유지하고 통치해나가야 하는 임무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실, 아랍 제국의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 정복이라기보다는 피종복지 주민들의 아랍화와 이슬람화였다. 아랍의 정치적, 군사적 우위의 시대는 극히 짧았다. 아랍인들은 곧 제국의 통치는 물론 그들이 이룩했던 문명의 주도권조차도 다른 민족에게 양도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와 신앙, 법은 살아남았고, 아직까지도 아랍 통치의 영원한 기념비로 남아있다.
3. 초기 칼리프 직위를 둘러싼 갈등과 분열
초대 네 칼리프는 세습에 의하지 않고 순니파의 율법적 선거방식인 승계에 의해서 등극했다. 그들은 “라시둔(Rashidun)”, 즉 “바르게 인도된 자들”이었고, 그들의 연속적인 통치기간은 순니파 무슬림들에 의해서 황금기로 간주되었다. 그 기간은 또한 존엄성과 도덕적, 종교적 인도에 있어서도 무함마드의 생존시대에 견주어졌다. 그러나 네 사람의 바르게 인도된 칼리프들은 초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암살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2대 칼리프인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는 불만을 가진 한 기독교도 노예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3대 칼리프인 오스만과 4대 칼리프인 알리의 살해자는 훨씬 불길한 자들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무슬림 아랍 반란자들에 의해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죽은 지 4반세기가 조금 지난 후에, 그의 공동체는 극심한 분열로 치달았고, 그의 국가는 정복자와 피정복자, 신구 무슬림 간이 아닌 아랍인과 아랍인 간의 반란과 내전으로 침몰했다.
아부 바크르의 짧은 통치가 그의 죽음으로 끝나고, 634년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가 그 뒤를 계승했다. 그의 10년간의 통치는 이슬람 국가의 형성을 위해서, 더욱이 무슬림 국민의 역사적인 기억을 집대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역사적 전승에 의하면, 우마르는 아부 바크르가 임종시에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대부분의 교우들에 의해서 즉각 인정을 받았고, 심각한 반대없이 통치를 해나갔다. 유일한 반대자들은 무함마드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의 기치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일부는 칼리프 후보자로서의 그의 개인적인 자질을 강조했고, 또다른 일부는 예언자의 승계권에 대한 정통성 때문에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우마르의 통치는 아랍인의 절대 다수에 의해서 인정을 받았고, 그는 통합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제국정부의 기능적, 제도적 바탕을 마련했다.
전승에 따르면 우마르는 53세 때 살해당했는데, 생전에 그의 승계권자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는 임종시에 6명의 원로 교우들로 구성된 ‘슈라(Shura)’라는 최고위원회를 지명하여 그 구성원 중의 한 명을 칼리프로 선출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최고위원회는 메카 대부족인 우마이야 가문에서 태어났고 초기 개종자의 내부 조직에서 메카 귀족의 유일한 대표자였던 오스만을 선택했다.
오스만의 성격은 그의 두 전임자가 받았던 존경을 자아내지 못했다. 예언자의 사후 10년이 조금 지나자 종교적인 연대감은 약화되기 시작했고, 더욱이 메카 출신이 칼리프에 등극하자 메카 귀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남용함으로써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감은 두 차례에 걸친 내전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내전은 656년 오스만이 암살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암살단은 오스만에게 불만을 털어놓기 위해 메디나에 왔던 이집트 주둔 아랍 군대를 이탈한 항명집단이었다. 그들의 행동과 이어서 전개된 일련의 투쟁은 이슬람 역사에서 한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으로 (그렇다고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었지만) 이슬람 칼리프가 그의 무슬림 추종자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슬람 군대가 서로 처절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항명자들은 결국 알리를 칼리프로 옹립했다. 알리는 선출된 칼리프들과 그들 측근들의 행위에 불만을 품어온, 그리고 예언자의 혈통에 의해서 통치되는 새 정권이 이슬람의 진정하고 고유한 메시지를 다시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고대해온 많은 무슬림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알리의 추종자, 즉 “쉬아투 알리(shiatu Ali)”로 알려졌고, 후일 단순히 쉬아로 알려지게 된다.
661년 1월, 5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 계속된 투쟁 끝에 칼리프 알리도 살해되었다. 이번에는 군인들의 항명집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극단적인 종교분파에서 밀파한 단독 암살범에 의해서였다.
제1차 이슬람 내전에 개입했던 여러 적대적인 쟁패 파벌 중에서 시리아 지방의 주지사였던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이 이끄는 집단이 승리를 거두었다. 때문에, 알리가 살해된 이후 그의 아들 하산은 일부 사람들이 그를 새 지도자로 보고 있었음에도 칼리프직을 포기하고, 시리아에서 칼리프로 대환영을 받고, 그때 이미 제국 전역에서 공인을 받은 무아위야를 인정했다. 무아위야의 등극은 이슬람 역사에서 우마이야 칼리프조로 알려진 하나의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 칼리프조는 비록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왕조였고, 우마이야 가문 내에서만 머물렀다. 당시에는 승계에 관한 어떤 원칙이나 권리가 정립되어 있지 못했고, 실제로 후대 이슬람 왕조들은 꾸란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군주제에 대한 강력한 입장 때문에, 장자상속권이나 기타 다른 형태의 고정된 승계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그의 생전에 아들인 야지드를 후계자로 임명함으로써 대부분의 후대 칼리프들이 답습하게 되는 하나의 선례를 만들었다.
우마이야 칼리프조는 1세기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다. 아랍 이슬람 역사를 기록한 이들은 대부분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쉬아파에게 우마이야 칼리프들은 공동체의 정당한 지도자인 알리와 그의 아들로부터 칼리프직을 빼앗아간, 그의 후손들을 살해하고 박해한 그리고 이슬람의 정통적 가르침을 거부하고 타락시킨 찬탈자로서 폭군에 다름 아니었다. 순니파 역사학자들의 입장에서도 우미이야 칼리프조는 찬탈자였고, 폭군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목적과 방법이 세속적이고 비종교적이었다. 고전 역사에서 그들의 통치는 전대의 바르게 인도된 통치자들에 의한 칼리프제와, 그들 후대의 신성하게 동의를 받은 칼리프제 사이의 일종의 중간적인 군왕제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우마이야 왕조의 업적에 대해서 비교적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하면서 위험하고 분파적인 내부 투쟁의 시기에 이슬람 국가 및 사회의 안정과 지속성을 유지한 뛰어난 통치자들의 승계에 비교적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제2차 내전은 즉각적인 정치적, 군사적 영향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했지만, 엄청나게 종교적인, 따라서 역사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한 봉기로부터 시작되었다. 680년 알리의 아들이고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이 이라크에서 반란을 주도했다. 무하람달(이슬람력 1월) 10일, 카르발라라는 곳에서 후세인과 그의 가족, 그의 추종자들이 전장에서 우마이야 군과 맞붙어 패퇴했다. 전승에 따르면, 유일한 생존자는 후세인의 병든 어린 아들 알리였다. 그는 텐트 속에 누워 있었는데, 살아서 모든 사실을 전했다. 카르발라의 대참사는 이슬람 역사에서 쉬아파 인식의 중심에 자리했고, 무하람달 10일은 쉬아파 종교력에서 중요한 날이 되었다. 쉬아파는 어디에 있든지 이 날, 희생과 범죄 그리고 속죄를 주제로 한 종교 의례를 통해서 예언자 가족의 순교와 그들을 구하지 못한 죄에 대한 참회 그리고 그들을 살해한 자들의 간교함을 생각한다. 순니파와 쉬아파 무슬림 간의 교리적인 차이는 기독교 교회를 분열시켰던 교리에 비하면 중요성이 훨씬 덜하다. 그러나 쉬아파의 순교와 박해의 감정은 그들이 찬탈자로 간주한 통치자 밑에서 수세기 동안 소수 집단으로서 경험해오면서 강화되었으며, 그들과 순니파 국가 및 다수 집단 사이의 심리적인 장벽, 경험과 외관, 나아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태도와 행위의 차이를 증대시켰다.
비극적인 역설이지만, 강력한 국가만이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시킬 수 있었고, 갈수록 강성해진 이슬람 국가는 이슬람의 사회적, 윤리적 이념과 수많은 절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저항은 지속적이고 활발했다. 그 결과 반란세력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인 때도 있었지만, 반란세력이든 방어세력이든, 그러한 모든 투쟁의 승리는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의 강화와 고대 중동식의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로의 전진 그리고 이슬람의 이상적 정부로부터의 일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는 무익한 것이었다. 그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일련의 종교적 분파가 생겼다. 각각의 교의와 본질과 지지성격은 달랐지만, 이슬람 창시자들의 급진적 역동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은 엇비슷했다. 처음 “아랍인”과 “무슬림”이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때의 종교적 투쟁은 일종의 아랍 내전이었다. 후일, 이슬람이 피정복민 사이에 급속히 퍼졌을 때는, 그런 운동에서 개종자들의 역할이 증대되고, 때로는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보편론자들의 호소와 이슬람적 개념의 영속적이고 혁명적인 힘에 대한 놀라운 증거는 이슬람 제국에서 일어난 거대한 급진 운동이 모두 이슬람의 테두리 내에서 일어났으며, 이슬람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4. 초기 이슬람에 대한 평가
이슬람의 초창기는 혁명적인 변화의 시기였다. 심층적인 의미에서 이슬람의 도래 그 자체가 일종의 혁명이었다. 새로운 종교는 앞의 두 성서를 가미한 제3의 성서가 아닌, 그것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경전을 가져옴으로써 기존의 교의와 교회를 압도해버렸다. 정복에 의해서 등극한 새 통치자들은 정치, 교회, 사회의 구질서를 뒤엎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질서를 마련했다. 이슬람에서는 처음부터 이상적으로 고안된 성직자도, 교회도, 왕도, 귀족도, 특권층도, 카스트도, 어떤 형태의 신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진정한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 그것을 거부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자명한 우월성만이 존재했다. 물론 여성에 대한 남성의, 노예에 대한 주인의 우월감 같은 명백히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위계는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등조차도 새로운 율법에 의해서 완화되고 인도적으로 변모되었다. 이슬람에서 노예는 고대 세계와는 달리, 더 이상 재물이 아니고 법적, 도덕적 지위가 인정되는 한 인간이었다. 여성은 비록 여전히 일부다처제와 축첩제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근대까지 서구에 못지않은 재산권을 부여받았다. 비무슬림조차 약간의 재정적, 사회적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중세는 물론 때때로 오늘날 기독교 세계의 많은 비기독교도들과 엄밀히 대조해보아도 뒤지지 않는 관용과 안전의 혜택을 누렸다. 이슬람이 무함마드 이후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하고, 오늘날에도 15억 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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