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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Foreign Affairs에 2011년 10월 11일 게재된 네그리, 하트의 글이다.
출처:
http://www.foreignaffairs.com/articles/136399/michael-hardt-and-antonio-negri/the-fight-for-real-democracy-at-the-heart-of-occupy-wall-street?page=show


맨하탄 남부의 노숙 야영 시위대가 대의의 실패를 말하다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 씀 / 연구공간 L 옮김

2011년 10월 11일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내건 시위가 많은 사람들과 공명하고 있다. 이는 이러한 일련의 시위들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경제적 부정의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하게는 이 시위들이 정치적 불만과 열망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가 남부 맨하탄에서 미국 전역의 도시와 마을들로 번져나감에 따라 기업의 탐욕과 경제적 부정의에 대한 분노가 실제적이고 또 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정치적 대의의 부족-혹은 실패-에 대한 항의 또한 최소한 동등한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다. 이것은 어떤 정치인 혹은 어떤 정당이 무능하고 부패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물론 이 또한 문제이긴 하지만) 더 일반적으로 대의정치체제 자체가 적합한가 부적합한가의 문제이다. 이 저항 운동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성 과정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변형되어야만 한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의 정치적 측면은 우리가 이것을 지난 한해 동안의 또다른 “노숙야영시위”들과 함께 놓을 때 시야에 들어온다. 이 시위들은 출현 중인 투쟁의 순환을 형성한다. 많은 경우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가가 명백하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스페인에서 있었던 주요 광장들에서의 노숙시위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이 시위는 지난 봄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점령을 따라 5월 15일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위들에 위스콘신 주의회 의사당에서의 광범위한 시위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 점령, 경제적 정의를 위해 벌였던 이스라엘의 텐트 야영시위와 같은 또다른 일련의 사건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이 다양한 시위들의 맥락은 물론 매우 다르며, 다른 곳에서 일어난 시위의 반복들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이 각각의 운동들이 몇 개의 공통적인 요소를 각자의 상황으로 번역해왔다고 할 수 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당시의 정권이 어떤 의미에서도 시위대들을 대의할 수 없다는 사실과 노숙시위의 정치적 성격이 명백했다. “무바라크는 떠나야 한다”는 요구는 다른 모든 이슈들을 아우를만큼 충분히 강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뒤이어 일어난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바르셀로나의 까딸루냐 광장의 노숙시위들에서는 정치적 대의에 대한 비판이 더 복잡했다. 스페인에서의 시위들은 채무, 주택, 교육을 비롯한 광범위한 일련의 사회적․경제적 불만들을 제기했다. 그러나 시위 초기에 스페인 언론이 시위들의 지배적 정서로 규정한 “분노”는, 분명 이러한 이슈들을 다룰 능력이 없는 정치 체계를 겨냥하였다. 현재의 대의 체계가 민주주의인양 하는 가장에 맞서 시위대들은 “Democracia real ya."(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를!)를 자신들의 중심적인 구호들 중 하나로 제기하였다.

그렇다면 ‘월가를 점령하라’는 이러한 정치적 요구들의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 혹은 변형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월가 점령 시위의 명백하고 분명한 메시지는 은행가와 금융 산업이 결코 우리를 대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월가에 이익이 되는 것은 국가(혹은 전 세계)에 분명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심각한 대의의 실패는, 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은행과 채권자들을 분명하게 대변하는 정치인들과 정당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순진해보이는, 기본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민주주의는 폴리스, 즉 사회․경제적 삶 전체에 대한 인민의 지배가 아닌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경제적 이해와 금융의 이해에 부차적인 것이 된 것처럼 보인다.

월가 점령 시위의 정치적 성격을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이 시위를 한낱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의 싸움이라거나 오바마 정부의 운명이라는 관점 안에 던져넣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이 계속되고 성장한다면 백악관이나 의회로 하여금 새로운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게 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것이 다음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중요한 논쟁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와 조지 W. 부시 정부 모두 은행 긴급구제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간 장본인들이다. 시위들이 강조한 대의의 부재는 양 당에 모두 해당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에 대한 스페인인들의 요구는 긴급하고 도전적으로 들린다.

카이로와 텔 아비브에서 아테네, 매디슨, 마드리드, 이제 뉴욕에 이르기까지 이 다양한 노숙 시위들 모두가 현존하는 정치적 대의 구조에 대한 불만족을 표출한다면, 이들이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이 제안하는 “진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단서들은 운동들 자체의 내적 조직화 안에, 특히 노숙시위들이 새로운 민주주의적 실천들을 실험하는 방식 안에 있다. 이 운동들은 우리가 “다중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따라 전개되어 왔으며 빈번한 의회와 참여적인 의사결정 구조로 특징지어진다. (또한 이러한 점에서 ‘월가를 점령하라’와 다른 많은 시위들이 적어도 1999년 시애틀과 2001년 제노바에까지 이어지는 지구화 항의 운동들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가 이 노숙시위에 채택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러한 네트워크 도구들이 운동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운동 자체의 수평적 네트워크 구조와 민주적 실험들에 조응하기 때문에 편리한 도구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 트위터는 사건을 알리는 데 뿐만 아니라 대규모 회의에서 구체적인 결정에 대한 견해를 실시간으로 투표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따라서 노숙시위가 지도자들이나 정치적 대표자들을 만들어내기를 기다리지 말라. 월가 점령에서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같은 사람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간에(우리는 분명 여기에서 희망적인 발전을 발견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지금 출현 중인 운동들의 순환은 대표자 없이 수평적인 참여적 구조들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다. 민주주의적 조직화의 이러한 소규모 실험들이 실질적인 사회적 대안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기 까지는,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진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이미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위기에 직면하고 그 위기가 현재의 정치 체계에 의해 관리되는 방식을 분명히 보면서 다양한 노숙시위 현장을 지키고 있는 젊은 사람들은 유례없이 성숙하게 다음과 같이 도전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껏 우리에게 주어졌던 민주주의가 경제 위기의 타격 앞에 비틀거리고, 다중의 의지와 이해를 주장하기에 무력하다면, 이제 그러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낡은 것으로 간주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부유한 자들과 금융의 세력들이 미국 헌법을 비롯하여 소위 민주주의적이라고 하는 헌법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면, 집단적 행복추구 기획을 새로이 시작하기 위한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새로운 헌법의 형상들을 제안하고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 않은가? 지중해와 유럽의 노숙시위들에서 이미 생동하고 있었던 이러한 생각과 요구들과 함께, 월가에서 시작해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간 시위들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구성 과정을 향한 욕구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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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구공간 L
이 글은 다라Daraa의 오마리 사원에서 군대의 학살이 있기 하루 전인 3월 22일 가디언지에 게재된 옴마르 압둘하미드의 글이다. 3월 15일부터 점화되기 시작한 시리아 봉기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혁명을 이끌고 있는 주체들은 누구인지에 대한 서술이 인상적이다. 규모로는 아직 이집트, 튀니지와 같은 전면적 혁명으로 보기 어렵지만, 이제 막 시작된 시리아에서의 대중봉기가 가지는 의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 글이 나온 다음 날 새벽 오마리 사원에 모여있던 시위대와 인근 지역의 다라 시민들을 군대가 무차별 총격으로 학살한 사건이 있었지만, 시리아 혁명의 기운은 이 글에서 저자가 예상했듯이 오히려 더 거세졌다. 오늘(3월 24일) 시리아에서는 '존엄의 금요일' 시위가 예고되어 있다. 두려움의 장벽을 넘어선 시리아인들이 민주주의와 해방에 대한 열망으로 시리아 전역을 뒤덮어 40여년 간의 독재정권을 분쇄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연구공간 L 
출처: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1/mar/22/syrians-protests-syria-revolutionary-spirit

지난 금요일 ‘분노의 날’은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다라에서의 시위는 지금 시리아의 혁명적 기운이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암마르 압둘하미드(Ammar Abdulhamid) / 연구공간 L 

2011년 3월 22일


지난 6주간의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2월 초에 나는, 점점 더 늘어나는 대중혁명 발생국가의 목록에 다음번엔 시리아가 올라갈 것 같은지 질문을 받았다. ‘Comment is free’란에 기사의 형식으로 한 나의 대답은 본질적으로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망명 중인 반대파 인사가 2월 5일에 호소했던 “분노의 날”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주된 이유는 당시 현장에서 구축되고 있던 네트워크가 그러한 요구에 응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은 시리아 전역에 지지자들의 네트워크를 확실하게 구축하고, 각각의 네트워크 내부와 네트워크들 간에, 그리고 시리아와 전 세계에 존재하는 지지자들 사이에 분명한 소통 전략과 방법에 대한 합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시리아 사회 내 특정 부문들의 관심사 뿐 아니라 국제 사회의 관심사를 다루기 위해 적합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나 이슬람주의자들이 미래의 민주화된 시리아에서 수행하게 될 잠재적 역할에 관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논점들이 이메일과 다양한 페이스북 집단을 통해 인터넷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논의의 주된 요지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혁명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였다. 나 자신을 비롯한 일군의 사람들은, 국내의 활동가들이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메시지를 정식화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하므로 적어도 여름 중반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쪽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 조바심을 냈다. 어떤 이들은 리비아에서 만일 가다피가 승리할 경우, 시리아인들에게 혁명을 호소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 염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압박했다. 3월 15일 이후 시리아가 혁명적 봉기의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어간 것을 보면, 분명 논쟁에서 승리한 쪽은 후자이다.

그런데 논쟁을 하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또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하나의 특정한 집단이나 조직, 정당이 아니었다. 망명 중이거나 국내에 있는 몇몇 반체제 인사들도 아니었다. 이들 대부분은 시리아에 살고 있는 십대, 이십대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이 젊은 혁명가들은 인터넷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시리아와 외국에 있는 기존의 반체제 인사들 및 민주화 활동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혁명을 훌륭히 수행해낸 혁명가 집단 가운데 멘토와 조언자들을 구하기 전에, 행동을 해야 할 때라는 결정을 이미 내렸다. 각각의 활동가 집단들은 자신들의 확립된 세계관과 우선순위에 기반하여 커다란 존경심과 연대의식을 느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소통했고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 것인지에 대해 합의했다. 이들은 현장의 지도자들이었다 - 결국 이것은 그들의 혁명이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시리아의 현 상황이 너무 국지화되어 있고, 전면적인 혁명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이 정권을, 이러한 사태가 전개되기 직전 바샤르 알-아사드가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관련링크)에서 보여준 독선적인 태도를 생각해보라. 그는 자신의 정권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고 풀뿌리 민중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휩쓸고 있는 혁명적 봉기에 끄떡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보면 초기 국면이긴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상황이 어떻게 계속 전개될 것인지는 모두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해졌다. 시리아 같은 경찰국가에서 사람들이 두려움의 장벽을 부수고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면, 폭력진압은 그들의 결의를 굳게 해 줄 뿐일 것이라는 것 말이다. 며칠 전 다라의 한 시민이 아랍 뉴스와의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요구사항밖에 없습니다. 자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쟁취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것을 좇거나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죽을 것입니다.”

다라의 사람들에게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라시내에서 전前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의 입상이 파괴되고, 다라시내 벽에 있던 아사드의 모든 사진이 훼손되거나 ‘아사드 퇴진’이라는 낙서로 바뀌었으며, 주지사의 사무실이 불에 타고, 아사드의 사촌 라미 마클루프Rami Makhlouf가 소유하고 있는 통신회사의 건물이 불탔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당신과 내가 짐작하는 것만큼이나 [다라 사람들이 요구하는 자유는] 급진적인 것일 것이다.

다마스쿠스 인근 마다야Madaya라는 마을의 시위대들이 3월 20일 벌인 작은 시위에서 이렇게 외쳤을 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짐작을 했음에 틀림없다. “국민은 정권퇴진을 원한다.”

아사드가 담벼락의 낙서에 벌벌 떨기만 하고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위의 구호를 제창할 것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만큼 사태가 빠르게 전개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두려움의 장벽이 무너진 지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고 거리낌 없이 외칠 것이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옷을 입었든 입지 않았든 간에 황제의 시대는 중동과 시리아 모두에서 끝났다고 외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 문턱에 당도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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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구공간 L

현재 바레인에는 바레인 다중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 에미리트, 카타르 등의 군사들로 구성된 걸프협력회의(GCC) 군대가 들어와 있다. 이란의 개입을 강력히 규탄하는 바레인 정부가 왜 이들 국가의 군사개입(을 적극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을 형제애의 발로라 환영하는지, 다음의 글을 통해 바레인 정부의 오랜 '귀화정책' 및 용병활용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레인, 리비아 등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용병 혹은 인종/민족간의 갈등이 아니라 이들간의 갈등의 배경에 놓여있는 계급 문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삶의 기반이 파괴된 추방자/이주자들이 결국 다중의 민주주의 투쟁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다중의 칼끝이 어디를 겨눠야 하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 연구공간 L 

오마르 알 셰하비 Omar al-Shehabi(걸프 정책연구소) / 연구공간 L 옮김  

2011. 3. 16

바레인에 GCC(걸프협력회의) 군대가 투입된 것을 두고 반대파들은 외국의 “점령”이라 부르는 반면 정부는 이를 이웃나라들의 형제애가 발휘된 지원이라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원주민-외국인” 문제는 바레인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바레인 뿐 아니라 걸프해 연안국 전체에서 중대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바레인 군주정은 군사 및 경찰 병력 뿐 아니라 자국의 정치적 균형을 전환시키기 위해서도 외국에 오랫동안 의존해왔다. 바레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무슬림들을 주로 지지기반으로 하는(그러나 배타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바레인 야당은 국가의 인구구성을 바꾸기 위해 정부가 주의깊게 선별된 외국인들에게 시민권을 마구잡이로 주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이 “정치적으로 귀화한 자들”(이 외국인들을 일컫는 말)은 대개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예멘, 요르단, 발루키스탄의 베두인 부족 출신이다. 이들은 지역 지배층들과 밀접한 인종적, 문화적 연결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5만에서 20만으로 추산되며, 바레인 국민의 10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정치적으로 귀화한 사람들은 주로 치안병력과 보안병력에 고용되었는데, 이는 정부가 그들을 지역주민 봉쇄 목적으로 데려온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 최근에 시위대에 대한 치안병력의 공격영상들(관련링크)을 살펴보면 몇몇 외국인들 혹은 정치적 귀화 주민들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국 병력들의 체계적 활용은 그 기원을 찾자면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것은 19세기에 영국에 의해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관련링크) 영국은 트루셜Trucial 해안지역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발루키스탄 사람들과 대륙 남쪽의 원주민들을 데려왔다. 이들은 지역민들에 동화될 위험이 적었고 이탈할 염려도 없었다. 적절한 물질적 보상을 제공하는 한 이들의 충성심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이 인구통계학적 긴장이 바레인의 최근 시위에서 전면에 드러났다. 여러 학교들에서 지역 학생들과 최근에 귀화한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관련링크) 최근에는 지역 출신 사람들과 정치적 귀화 주민들이 모여 사는 교외 마을에서 청년들 간에 심한 난투가 있었고 수 명이 부상당했다.(관련링크)

그러나 이 문제는 분리주의에 기반한 것만은 아니다. 정치적 귀화는 바레인의 여러 지역 분파들로부터 불만을 샀고 충돌을 일으켰다. 2년 전에 일어나서 널리 알려졌던 충돌은 수니파 집안의 구성원과 정치적으로 귀화한 주민들 사이에 벌어졌다. 이 사건은 바레인에서 유명한 소송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실제로 수니파 주민들은 정치적 귀화로 인해 자신들이 가장 고통받는다고 자주 불평한다. 귀화한 주민들이 이전에 수니파가 주로 차지했던 치안병력 일자리와 거주지역을 점점 차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정권은 또한 바레인에 거주하는 추방자 노동력 일부를 완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자의든 타의든 추방자 집단은 친정부 시위에 참석해왔으며 시위의 규모를 부풀리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대다수의 추방자들은 비정치적인데, 그들의 이해관계가 대개 경제적인 영역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구통계학적 구성은 경제영역에서 지역 주민들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왔다. 이는 정권으로 하여금 근대 바레인 역사의 지속적인 특징이었던 노동문제로 인한 소요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현재 바레인인들은 전체 노동력의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적 생산의 측면에서 바레인인들의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또한 그들은 전체 바레인 주민 120만 인구 중의 절반(관련링크)에도 못미친다(10년 전 3분의 2를 차지하던 것에서 엄청나게 줄어든 것임).

바레인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명한 정치적 분파들에 기인하지만 외국인과 원주민들 사이의 문제는 걸프 지역 전체에 만연해 있는, 제도화된 연금수령자-국가 시스템에 뿌리박고 있다. 이것은 지배 엘리트들이 막대한 오일 머니로 구축한 광범위한 복지국가 체계를 통해 지역 주민들을 달래고, 대신 이들이 정치적, 경제적 전선에게 주변화되도록 하는 것에 기반한다. 생산적인 경제활동은, 엄격하게 통제받고 제한된 노동권을 가지고 있는 추방자 노동력들에 의해 주로 수행된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는 지역주민들이 외국인 등을 비난하기가 훨씬 쉽다. 현재의 연금수령자 국가 구조가 획기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이상, (이미 바레인과 리비아 사태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지역주민들 사이의 인구통계학적 상호교착은 다른 걸프 국가들의 안정에도 결국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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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구공간 L
이 글은 2011년 3월 2일 가디언지에 게재된 글이다. 저자는 2000년부터 시작된 이집트의 정치, 경제 투쟁이 2011년 이집트 혁명의 토대를 쌓아왔음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북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혁명이 어디서 어떻게 준비되어왔으며 어떤 기폭제로 인해 이토록 커다른 폭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지, 그 단초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글이다. - 연구공간 L
출처: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1/mar/02/egypt-revolution-mubarak-wall-of-fear?INTCMP=SRCH

"호스니 무바라크가 세운 두려움의 장벽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도 해방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호쌈 엘-하말라위(Hossam el-Hamalawi)/연구공간 L 옮김

2011년 3월 2일 수요일


1990년대에 사람들은 호스니 무바라크의 이름을 단지 귓속말로만 속삭일 수 있었다. 전화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나 농담을 하는 것은 기피했다. 2011년, 수백만의 이집트인들이 늙은 독재자에 맞서 18일 동안 싸웠다.(관련링크) 이들은 최루가스, 고무총탄, 실탄을 쏘아대는 경찰에 용감히 맞섰다. 이집트인들은 두려움을 버렸다. 그러나 이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집트 혁명은 2011년 1월 25일에 돌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 동안 무르익은 과정(팔레스타인 인티파다와 연대했던 2000년 가을 시위(관련링크)에 대한 연쇄적 반응)의 결과이다.

1990년대에 무바라크 정권과 이슬람주의 과격분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더러운 전쟁의 발발과 무바라크의 철권통치는 거리시위의 죽음을 의미했다. 대중집회와 거리시위는 금지되었고 이를 어길 시 무장세력을 대면해야 했다. 파업 참가자들에 대해 실탄이 사용되었다. 노동조합은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에서 인티파다 운동이 발발하고 나서야 1977년 이후 아마도 처음으로 수만명의 이집트인들이 거리시위에 나섰다. 당시의 시위들은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위한 것이었지만, 곧 반체제적 성격을 띄게 되었고 경찰이 나타나 평화시위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있었고 나는 반 무바라크 구호를 거의 듣지 못했다.

2002년 4월 카이로 대학 인근에서 있었던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에서, 시위대 전체가 처음으로 대통령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던 때를 기억한다. 악명높은 중앙보안부대와 싸우면서 시위대는 아랍어로 “호스니 무바라크는 [아리엘] 샤론과 똑같다!”라고 외쳤다.

2003년 3월 이라크 전이 발발하자 분노는 훨씬 더 큰 규모로 폭발하였다(관련링크). 3만명 이상의 이집트인들이 카이로 도심에서 경찰과 맞서 싸웠고 잠시동안 타흐리르 광장을 점령했으며 무바라크의 사진을 불태웠다.

알자지라 및 팔레스타인 반란 위성 네트워크가 보여주는 장면들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 주도의 맹공습은 이라크 전역의 활동가들로 하여금 두려움의 벽을 한 귀퉁이씩 허물어뜨릴 수 있게끔 고무했다. 2004년에 친팔레스타인 그리고 반전 운동가들이 무바라크와 그 일가를 겨냥한 케파야(Kefaya) 운동을 시작했다(관련링크).

이 운동이 노동계급과 도시빈민 사이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소셜 미디어와 주류 언론 모두를 활용함으로써 이집트의 정치문화를 바꾸는데 기여했다. 수백만명의 이집트인들이 집에 앉아서 이 용감한 젊은 활동가들이 카이로 도심에서 대통령을 조롱하고 1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슬로건이 적힌 펼침막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006년 12월, 나일강 삼각주의 도시인 마할라에 위치한 중동 지역 최대의 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관련링크). 이러한 행동은 20년에 걸친 산업노동운동의 잠복기 이후에 발생한 것이었으며 IMF와 세계은행의 축복을 받은 공격적인 신자유주의 프로그램 및 억압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광범위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마할라 파업이 승리한 이후에 거대한 파업 물결이 방직산업 분야를 집어삼켰다.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도 마할라의 노동자들이 획득한 것과 똑같은 것을 요구했다. 한 산업분야의 투쟁은 순식간에 다른 경제부문으로 퍼져나갔다. 소셜 미디어와 주류 언론이 내보낸 파업현장의 모습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점차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른 부문의 파업 승리 소식에 고무되어 시위를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7년 파업 물결을 다루는 보도에서 나는 파업 참가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마할라 소식을 들은 이후에 우리는 행동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단지 경제적인 투쟁에 불과하다고 비웃었지만, 파업물결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관련링크). 2008년 4월 빵 가격에 항의하는 소규모 반란이 마할라시에서 발생했다(관련링크). 보안대는 2일만에 이 봉기를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2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체포, 고문당했다. ‘마할라 인티파다’로 알려지게 된 봉기의 장면들은 2011년에 일어난 사건의 총연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시위대들은 무바라크의 초상화를 끌어내리고 거리에서 경찰과 싸웠으며 증오의 대상이었던 국가 민주당의 상징물을 부수었다. 곧 이와 유사한 반란이 나일강 삼각주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엘 보롤로스시에서 일어났다(관련링크).

이 봉기들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거의 매일같이 노동자들의 파업과 점거, 카이로 도심 및 지방에서 활동가의 소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010년 봄과 겨울 동안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들은 그 지역의 칼럼니스트들이 “카이로의 하이드 파크”라고 부른 의회 인근 지역을 점거했다.

이렇듯 국가에 대항하여 매일같이 일어나는 경제 및 정치 투쟁은 무바라크 체제의 정당성이 급속도로 침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한 정당성이 있긴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2010년 10월 즈음, 이집트 사회에는 분명 어떤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관련링크). 이곳저곳의 파업 현장을 마주치면서 직장으로 향하는 것이 평범한 일이 되어버렸다. 사무실에서 집으로 향하는 공무원들은 카이로 도심에서 소규모 집회를 열고 있는 활동가들을 지나가야 했다. 공무원들은 그 현장을 보았고 흔치 않게 거기에 반응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일매일 발생하는 충돌을 직접 목격하고 있었다(관련링크).

그 때 튀니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독재정권을 전복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혁명이 대개 알 자지라에 의해 이집트 등지의 수백만 시청자들에게 방송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수많은 기폭제 중 하나일 따름이다. 경찰이 일상적으로 보여준 잔혹함이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2011년 1월 25일에 시작된 봉기는 두려움의 장벽이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온 기나긴 과정의 결과였다. 이 모든 사건의 핵심은 현장의 행동들이 엄청나게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시각적 이미지로 전송되었다는 것이다(관련링크). 동일한 해방의 욕망을 가지고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 다른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한 사람의 두려움을 불식시켜주는 것은 없다(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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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랍연구 웹진인 Jadaliyya에 실린 칼리 마이드호프(Callie Maidhof)의 글이다. 마이드호프는 현재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아랍 혁명'으로 규정하는 것과 리비아의 용병들을 '아프리카 용병'으로 부르는 것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아랍인과 아프리카인 간의 적대 및 위계, 인종차별주의를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류언론들의 보도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지역의 혁명 소식에 관심있는 대중들이 간과해온 중요한 문제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글이다.- 연구공간 L

출처:
http://www.jadaliyya.com/pages/index/767/the-arabs-in-africa

칼리 마이드호프(Callie Maidhof) / 연구공간 L 옮김


리비아인들이 무아마르 알 가다피의 41년간의 독재에 맞서 봉기했을 때, 국가 폭력에 관한 여러가지 주장들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가다피가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 ‘아프리카 용병들’을 고용했다는 것이었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정치깡패’(아랍어로는 발타기야baltagiya. 이 말은 순식간에 유행처럼 널리 퍼졌다.)처럼, 용병은 폭력의 반민중적 측면을 보여준다. 그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은 개인적 신념이나 국가적 의무 때문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정권으로부터 대가를 받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용병과 정치깡패들은 시위대의 비폭력적이고 열정적인 정치와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가다피의 용병을 혁명가 및 무바라크의 정치깡패 모두로부터 구별지어주는 것이 하나 더 있다.그것은 바로 그들이 계속해서 ‘아프리카인’으로 언급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스페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럽인 용병들이 고용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의미없는 기표일 뿐이다. 결국 리비아도 아프리카 국가이고 리비아인들도 아프리카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스를 보는 우리들은 이 말이 ‘의도’하는 바를 알고 있다. 또한 몇몇 기자들은 이 말을 ‘아프리카 흑인들’ 또는 간혹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인들’로 재빨리 고쳤다.

이것은 최근 리비아 상황의 단면일 뿐이지만, 그 기저에 있는 아랍인과 아프리카인, 혹은 아랍인과 흑인 간의 적대라는 개념화에서 무엇이 관건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개념화는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을 상호배타적인 범주로 정식화할 뿐만 아니라 리비아 혁명의 맥락에서 이 상호배타적 관계를 고착화한다.

이러한 정식화는 리비아 국경 바깥에서의 묘사에서 뿐만 아니라 리비아 ‘현지’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일반화된 언론통제는 현지 상황에 대한 파악을 심각하게 어렵게 만들었다. 몇 안되는 평자들만이 봉기를 계속 지지하면서도 ‘아프리카 용병들’에 대한 비난을 문제삼았다.

아프리카 용병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증거는 대부분 외국 여권이나 서류, 혹은 살아있거나 죽은, 검은 피부를 한 사람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경우 분노에 차있거나 폭력적인 시위대들에 여지없이 둘러싸여있다.(관련링크) 그러나 1) 이 사람들이 민중 봉기에 맞서 국가가 사주한 폭력에 가담하고 있고 2) 바로 이 목적만을 위해 리비아에 온 것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리비아가 약 200만명의 아프리카 흑인 이주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미 친숙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리비아의 인종차별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혁명이 시작된 2월 17일 분노의 날로부터 1년 전인 2010년 2월 16일에 UN을 감시하는 독립기구인 UN 워치는 ‘리비아는 아프리카 흑인 이주민 등에 대한 인종차별을 끝내야 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최근의 역사를 조명해보면 ‘아프리카 용병들’의 동영상과 사진들은 혼란스러운 문제를 제기한다. 사진이나 동영상 속의 사람들은 국가가 사주한 폭력의 가해자들인가, 인종차별의 희생자들인가,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는가? 이들은 보복이나 전투의 과정에서 공격당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피부색에 근거해서 용병으로 간주된 것인가? 이것은 비시민이 자신과 무관한 갈등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인가?

가다피가 외국 용병들을 고용했든 하지 않았든, (리비아에 있든 외국에 있든) 우리 중 누구도 그 전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발이 사실로 받아들여진 속도를 보건대, 우리는 아랍인과 아프리카 흑인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문제삼아야 한다.

아랍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이 비극적으로 대립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미국 등의 정책입안자들 뿐 아니라, 다양한 씽크탱크와 국제기구, 인도주의적 국제기구 등에도 내재해 있었다. 훨씬 더 극단적인 사례로는 수단을 들 수 있다. 이 주제에 대해 마흐무드 맘다니(Mahmood Mamdani)는 자신의 저서(2009)에서 수단의 사회적 (및 종족적) 분할을 부족 상태로 복귀시키고 구체화하려 했던 정착민과 토착민이라는 식민시대의 비유에 근거하여, 아랍인과 아프리카 흑인 사이의 외관상의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맘다니는 ‘세이브 다르푸르’처럼 다르푸르에 초점 맞추는 반학살 캠페인은 논의를 도덕의 영역으로 전환시킴으로써 1) 갈등을 테러에 대한 전쟁과 연결시키고 2) 미국이나 다른 서구 권력들의 군사적 응대를 부추겨서 반란/대항반란을 탈정치화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수단을 중동의 정치적 지형 안에 가둔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탈정치화 내러티브 기술이, 일반화된 대중으로서의 아프리카인이 직면한 문제와 아프리카에 대한 기존의 생각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다르푸르 반란/대항반란의 탈정치화는 그러한 반란을 테러리즘의 층위에 가져다놓을 뿐 아니라, 예컨대 HIV/AIDS, 가난, 끝도 없어 보이고 이해할 수도 없는 폭력의 무수한 다른 경우들처럼 아프리카 대륙을 포위해온 비정치적 악의 하나로 위치시킨다.

이것은 리비아 문제, 특히 ‘아프리카 용병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다르푸르에서의 폭력을 틀짓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정책 입안자, 언론인, 기구들이 아랍인을 ‘아프리카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들이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따라서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이 각각 (다른 정도로 고통을 주고, 다른 해를 가하고, 다르게 정치를 다루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을 함께 묶어 생각하는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프리카 흑인과 아랍인이 매우 다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리비아의 이야기는 수단의 이야기와 상당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인(흑인)과 아랍인의 적대라는 주제가 여기서도 반복된다. 이는 대중들 뿐 아니라 심지어 학자들조차도 아랍인을 아프리카 대륙과 동질화하는 분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것은 식민주의적 인종정치와 냉전 지역 연구 패러다임의 지속이다.

현재 리비아에서 진행 중인 혁명은 예멘, 요르단, 바레인 등지에서 계속되고 있는 봉기와 함께, 튀니지에서 이집트로 옮아간 지역 혁명의 연속으로 올바르게 해석되어 왔다. 이 지역적 격변에 쉽게 영향 받으리라고 간주되는 지역은 최소 알제리에서 이란에 이르고, 이 지역은 아랍 세계나 중동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란인들은 아랍인이 아니고 알제리의 대부분은 서쪽 프랑스와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형도는 지중해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지역, 적어도 아프리카와 관련되어 있는 지역에까지 이르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성공한 두 개의 혁명[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정치 및 가봉, 마우리타니아, 지부티, 우간다와 같은 지역들과의 관계에서 두 혁명의 영향을 생각하는 데는 전반적으로 실패해왔다.

이것은 이 나라들이 아프리카 정치에 역사적으로 깊게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리비아는 인접국들과의 관계에서 오랫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가다피 자신도 아프리카 정치에 깊이 관여해왔다. 2월 22일 연설에서도 가다피는 중동이라 불리는 것의 공명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과 아프리카의 유대를 재차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없으면 리비아는 미국에 점령당하거나 아랍 에미리트에 병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아랍연맹은 자국민들에게 잔혹한 대응을 한 데 대해 리비아에 제재를 가했지만 아프리카 연합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다피는 아프리카 연합의 의장이었다.)

‘아프리카 용병’이라는 말의 사용은 차이의 장소로서의 아프리카인-적임(African-ness)을 가리킨다. 그러나 가다피의 이력은 아프리카 정치에 대한 요란하고 기억할만한 관여로 특징지어진다. 가다피는 심지어 아프리카 ‘왕들의 왕’, 아랍어로는 ‘말리크 알-물루크(Malik al-muluk)’를 자신의 칭호로 삼았다. 이것은, 만약 가다피가 리비아 국민이 아닌 용병들을 고용했다면 그것은 가다피와 리비아가 이 지역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지, 이 둘 간의 절대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개입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아프리카인’라는 말이 다양한 방식으로 ‘외국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이번 봉기가 ‘리비아’ 및 ‘리비아인’과 가다피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근본적인 단절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가다피는 최근까지도 그의 국가 및 국민과 한 몸인 것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가다피가 아프리카와 끈끈한 유대를 맺은 것과 달리, 리비아인들은 아랍 혁명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고 말이다.

이러한 견해가 얼마간의 진실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칠게 지정학의 정치라 부를 수 있는 것에 관해 뭔가 다른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 ‘아프리카’, ‘중동’과 같은 용어들이 [사회적] 지형도나 현실정치의 연결 관계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적 기표의 대역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은 다양한 형태의 유럽 식민지배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지만 유럽 대륙(이 점을 지적하고 싶은데, 유럽대륙은 대륙도 아니고 아대륙 같은 것이다) 내에서 전혀 다른 재현의 역사 혹은 역사적 가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 뿌리깊은 역사는 냉전의 잔여물인 지역연구 패러다임에 의해 더욱 조장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의 혁명(그 중에서도 특히 리비아 혁명)과 나아가 이 혁명이 아프리카 대륙의 정치에 끼칠 영향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방해해왔다. 리비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봉기에 연대하면서도, 인종이 이 혁명적 계기를 형성함에 있어 수행하는 역할을 비판하는 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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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구공간 L
이 글은 미국의 중동전문가인 Juan Cole의 블로그에 지난 2월 20일 게재된 글이다. 주류 언론에서 중동 및 북아프리카 혁명에 대해 퍼뜨리고 있는 왜곡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이는 서방 언론의 기사와 거기에 담겨있는 관점을 그대로 받아 옮기고 있는 한국 언론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될 수 있는 지적일 것이다.
출처: http://www.juancole.com/2011/02/top-five-myths-about-the-middle-east-protests.html


Juan Cole / 연구공간 L 옮김
2011. 2. 20


5. 우파 블로거들과 빌 마허(Bill Maher) 귀하: 당신들은, CBS 기자 라라 로건(Lara Logan)에게 가해진 비난받아 마땅한 집단공격에 근거해 무슬림 국가의 여성들의 지위를 일반화할 수 없다. 한 가지 사건에 기초해서 집단 전체에 관해 일반화하는 것을 ‘극도의 편견’이라 한다. 그것은 또한 ‘성급한 일반화’라고 알려져 있는 논리적 오류이기도 하다.(우파 수구꼴통들에게 6음절로 말해주자면 ‘네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로건을 구한 것이 힘 세지 않은 이집트 여성들이었다거나 앤더슨 쿠퍼(Anderson Cooper) 또한 공격당했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군중들에 의해 폭행당한 기자나 유명인사들의 사례는 여기에도 있고 여기도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 대해서는 즉시 일반화하지 않는 수구꼴통들과 빌 마허는 찌질이들이다.


무슬림에 대해 좀 더 잘 알아야 하는 무슬림 혐오자 빌 마허에게: 20개의 무슬림 국가들에서 여성들이 투표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 와하비 사우디 아라비아의 2천 2백만 주민에 근거해서 15억 무슬림들에 관해 일반화하는 것을 제발 그만둬라. 오직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만 여성이 운전을 할 수 없고 남성만이 (지자체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다. 이것은 펜실베니아의 아미쉬 종파1) 사람들을 보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일반화하고는 기독교인들이 말과 마차에 매료되는 것과 기독교의 관계가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것과 같다.


4. 바레인의 소요가 상당부분 이란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이등시민처럼 취급받는 아랍 시아파인들의 자생적 항의이다. 시위대는 자신들의 지도자들이 정부와의 대화에 대비하여 상의하고 있을 때 도심의 진주광장에서 노숙을 했다.(관련링크) 위키리크스는 미국 정부가 바레인 수니파 군주정이 이란에 대해 두려움을 표하는 것을 계속해서 무시했음을 보여준다.(관련링크).


3. 의회정치로 방향을 틀기 이전의 무슬림 형제단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든 네 살의 성직자 유수프 카라다위(Yusuf Qaradawi)는 절대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가 아니다. 카라다위는 금요일에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설교를 했다.(관련링크) 그는 2001년에 무슬림들에게 미군과 함께 탈레반, 알카에다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지난 금요일에는 이집트 혁명에서 콥트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활약을 칭송했으며 분리주의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카라다위는 많은 이슈들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이지,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호스니 무바라크를 쫓아낸 청년운동이나 노동자 운동들이 카라다위를 자신들이 할 바를 알려줄 지도자로 삼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2. 튀니지와 이집트의 미래를 생각해볼 때, 지긋지긋한 반 무슬림 이스라엘 선동가인 배리 루빈(Barry Rubin)이 떠들고 다니는 것처럼(관련링크), 무슬림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열리면 항상 무슬림 근본주의 당들이 승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멍청한 이 주장은 2008년 파키스탄 선거와 2009년 알바니아 선거, 2003년 이후 이라크 쿠르디스탄 선거와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모든 선거들을 보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된다.


1. 소통과 네트워킹의 도구로서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과 공장노동자들이 아랍 봉기에서 소셜미디어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관련링크). 리비아에서 인터넷 서비스에 대한 정부의 공격은 토요일에 있었던 벵가지시의 대규모 봉기(관련링크, 정부는 이 시위에 살상무기를 사용했다)를 막을 수 없었다.


AP통신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일어난 토요일 봉기를 돌아봤다.(http://www.youtube.com/watch?v=hkigvv3ayao)


1) 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거주한다. 이들은 재세례파가 보수화되면서 등장한 교파의 성격답게 자동차나 전기, 전화등의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종교적 이유로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켜왔다. 이들은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여 군대에 가지않고, 공적연금을 수령하지 않는등, 정부로부터 어떤 종류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대부분이 의료보험에 들지 않는다. 이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한 재세례파의 교리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시파 교인들은 펜실베이니아 독일어로 불리는 독일어 방언을 쓴다. 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검은색 계통의 옷만을 입으며, 대다수의 교인들이 전통적 방식의 농축산업에 종사한다. 어린이들도 자신들이 설립한 마을내 학교에서만 교육을 시키며, 종교는 연구대상이 아니라는 신앙에 따라 종교와 과학은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읽고 쓰는 법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지식만 배울 뿐이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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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구공간 L
이 글은 2011년 2월 7일 marxist.com에 실린 프레드 웨스턴(Fred Weton)의 글이다. 무바라크 퇴진 이전에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혁명이 중동 및 북아프리카 전역에 미칠 파급력을 거의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일이 지났지만 읽어볼만한 글이다. 2월 17일 현재 바레인, 이란, 시리아, 예멘, 알제리, 요르단 등지에서 반정부시위와 정부의 유화정책 및 탄압이 복잡하게 뒤얽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어 이러한 시위의 배경과 전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원문의 분량이 많은 관계로, 3회에 걸쳐 게재하였으며 이번 글이 마지막 부분이다. -연구공간 L
출처:
http://www.marxist.com/egyptian-revolution-arab-worl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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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튀니지에서 벤 알리가 퇴진한 직후, 수단의 보안대는 야당 지도자인 하싼 알-투라비(Hassan al-Turabi)를 체포했다. 이는 알-투라비가 속한 당이, 수단정부가 물가 상승 추세를 뒤집지 못하면 “대중혁명”을 일으키자고 한 직후에 일어났다.

투라비는 AFP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는 앞서 일어난 대중 봉기들을 알고 있습니다. 튀니지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수단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유혈사태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 전체가 무장하고 있습니다. 마을들에서 그것은 대중봉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푸르(Dafur)와 코르도판(Kordofan)에서 저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수단에서 저항운동이 터져나왔고 지난 주말에는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월 31일 월요일에는 알리아(Aliah) 대학의 학생 모하메드 압둘라만(Mohammed Abdulrahman)이 경찰에 의해 구타당한 후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권은 많은 대학들을 폐쇄했으며 엄청난 경찰병력을 대학 캠퍼스에 배치했다. 카르툼(Khartoum) 대학 의학부에서는 경찰이 300여명의 학생들이 캠퍼스를 나서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학생들은 저지선을 뚫고 나와 “독재에 맞선 혁명!”을 외쳤다.

정권은 학생 시위에 대한 일체의 언론 보도를 막으려고 시도했다. 이것이 전염적인 효과를 나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몇주 동안 수단은 생필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점증하는 인플레이션과 함께 더 깊은 경제 위기로 빠져들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불안을 겪어 왔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수단의 핵심 상품인 석유제품과 설탕에 대한 보조금을 감축했다. 분명 수단 또한 끓어오르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

이 지역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는 세계최대의 석유 수출국이라는 점에서 핵심적인 국가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이 “우호적인 정권”이 무너져서 세계 경제가 돌아가는데 너무나 필수적인 석유의 안정적 공급이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극도로 염려하고 있다.

공식적인 실업률이 10%에 이르고 인플레이션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서구와 사우디의 분석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가 막대한 양의 석유 재산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이용해 분노와 좌절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예컨대 사우디 아라비아는 큰 어려움 없이 식량에 대한 원조를 증가시킬 수 있다. 사우디는 12월에 기록적인 예산안을 통과시켰고 2013년까지 5년간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4천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다. 어떠한 정당이나 조합도 없다. 시위와 파업은 불법이다. 학생조직, 노동조합, 정당 같은 것도 일체 없다. 그러나 사우디 정부는 두려움에 떨면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켜본다. 이 두 나라도 안정적이고 혁명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졌었다.

1월 31일 사우디-프랑스 은행은 ‘주의: 이집트로부터의 감염이 곧 닥칠것이지만 통제가능하다’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사우디-프랑스 은행의 수석 경제학자인 존 스파키아나키스(John Sfakianakis)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우디인들은 각종 보조금을 유지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격리되어있지 않다...그것은 사우디의 모든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이다. 사우디인들은 실업과 일자리 창출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월 5일자 파이낸셜 타임즈지는 오바마 행정부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직면한 딜레마에 대한 흥미로운 논평을 게재했다. “[미 행정부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커다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세계최대의 석유 수출국이지만, 젊은 층의 인구가 그러한 석유 재산의 이익을 체감하지 못하는 땅이기도 한 사우디 아라비아가 유사한 격변에 의해 흔들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지난 달에 200여명의 교사들이 정부에 일자리를 요구하면서 교육부 건물 바깥에서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한 시위들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시위는 지난 주 금요일에 있었던 시위이다. 제다(Jeddah)에 모여 빈약한 사회기반시설에 항의하던 시위였는데, 시위대 몇몇이 체포되었다. 당국이 시위를 해산하고 참여자들을 구금하기 전까지, 제다의 메인 거리에서 있었던 금요 기도회 바로 직후 시위를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은 시위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주민들이 훨씬 더 뿌리깊은 곳에서부터 느끼는 불만이 있음을 암시한다. 위에서 언급한 스파키아나키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는 더 이상 중동의 안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중동의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성이 많지도 않고 침묵하지도 않는다. 튀니지 사태 이후 우리는 이집트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부르주아 분석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가난 때문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난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이집트에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이집트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는 아니다. 혁명적 봉기를 야기한 것은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의 이행, 경제위기 국면에서의 급상승과 급하강이다. 과거에 용인되었던 개혁을 철회하는 것은 강력한 운동을 야기할 수 있다.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이들 국가의 부는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 나라는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예컨대 이집트는 2003년 이후 연평균 5.5%의 성장률을 보여왔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이 평등하게 분배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와 맞서고 있다. 이 자체로 혁명의 방아쇠가 당겨질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이 부패하고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최근의 운동에 참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같이 매우 안정적으로 보이는 체제에서 조차도 강력한 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제국주의에게 함의하는 것

아랍 세계 전역에서 갑작스런 혁명의 폭발은 제국주의에게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1960년대에 많은 아랍 국가들이 좌파로 전향했다. 이것의 좋은 예가 시리아의 경우인데, 시리아 경제는 소련 경제를 모델로 삼았다. 과정이 그렇게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곳에서도, 예컨대 이집트의 나세르(Nasser) 정권 같은 곳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경제의 큰 부분이 국유화되었고 이와 함께 보건, 교육, 식량 보조 등의 복지 조치의 발전이 병행되었다. 이 모든 것은 대중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나세르는 많은 이집트인들에게 좋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제국주의에 맞선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랍 국가들에게도 광범위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 이후 그러한 과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는 나세르의 후계자인 사다트(Sadat) 정권이 미 제국주의의 영향력 아래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민영화가 시대의 명령으로 행해졌다. 또한 이스라엘의 적이었던 이집트가 국제무대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그 이후로 그것을 준수해오고 있다. 요르단 또한 그러한 협정에 서명했다. 벤 알리가 권좌에 올랐을 때 튀니지 경제의 80%는 국가의 통제 하에 있었다. 23년이 지나 벤 알리는 경제 전체를 민영화하고 이와 함께 과거의 많은 개혁조치들을 파괴하여 그것을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똑같은 그림을 중동 전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러한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있다. 즉 전 지역의 혁명이라는 결과를.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미국의 핵심적인 동맹으로 간주된다. 이 안락하고 안정적인 관계는 이제 대중들의 혁명적 운동에 의해 위험에 처해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혁명의 조건들을 창출해냈으므로 이제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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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1년 2월 7일 marxist.com에 실린 프레드 웨스턴(Fred Weton)의 글이다. 무바라크 퇴진 이전에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혁명이 중동 및 북아프리카 전역에 미칠 파급력을 거의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일이 지났지만 읽어볼만한 글이다. 2월 15일 현재 바레인, 이란, 시리아, 예멘, 알제리 등지에서 반정부시위와 정부의 유화정책 및 탄압이 복잡하게 뒤얽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어 이러한 시위의 배경과 전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원문의 분량이 많은 관계로, 2회 혹은 3회에 걸쳐 게재할 예정이다. -연구공간 L
출처:
http://www.marxist.com/egyptian-revolution-arab-worl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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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지난 1월 30일 일요일 모로코의 도시 페스(Fes)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물가 상승과

사회적 조건 악화에 맞선 시위에 나섰다.(동영상) 시위대는 국왕 모하메드 6세의 운명과 벤 알리의 운명을 연결짓는 구호를 외쳤다. 이 시위는 1월 20일 북부 도시 테투안(Tetouan)에서 있었던, 물가 상승과 공공 서비스에 대한 급습에 항의하기 위해 지역 위원회가 조직한 시위에 뒤이은 것이었다. 테투안 시위에는 (모로코의 IMT(국제맑스주의경향) 분파인)공산주의행동연맹이 참여했다. 300명의 사람들이 모인 테투안 집회는 튀니지 혁명과도 연대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동영상)

지난 며칠 동안 스페인 언론은 폭동진압 보안부대와 군대가 대규모 소요사태를 대비해 사하라에서 모로코의 주요 도시들로 이동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모로코 정부는 이러한 보도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모로코 정부가 자국에 혁명의 가능성이 번지는 것을 매우 우려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즉각적인 실현을 위한 운동’으로 불리우는 ‘분노의 날’이 2월 20일로 예정되어 있다. 이 날은 또한 모로코 전역의 시위에 중심적인 지점이 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지가 이집트는 “다르기” 때문에 튀니지와 같은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독자들의 불안함을 누그러뜨리려 시도했던 것과 똑같이, 스페인 외무부 장관 트리니다드 히메네스(Trinidad)도 최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상황이 모로코의 상황과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모로코는 이미 “민주적 개방”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부는 지브랄터 해협 바로 건너편에서 혁명이 분출하는 것을 그다지 보고싶지 않은게 틀림없다!

그러나 모로코 국왕과 훨씬 더 가까운, 그의 첫 번째 조카 물레이 히캄(Moulay Hicham) 황태자는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엘 파이스(El Pais)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 모로코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거의 모든 권위주의적 체계들이 거대한 저항의 파고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가자와 웨스트뱅크(the West Bank)

이집트 동쪽 국경에 바로 접해 있고 반동적 하마스가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가자지구에서는, 이집트 국민들의 운동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과거에 소위 몇몇 맑스주의자들은 하마스를 좌파의 지지를 받을만한 진보세력으로 그렸었다. 그러나 실상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통치해온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이하 PLO) 지도부의 부패로 인해 생겨난 공백을 단지 차지했을 따름인 극도로 반동적인 세력이다.

하마스는 스스로를 ‘혁명적’이고 ‘반제국주의적’으로 그리고자 애썼다. 그들이 정말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집트에서 전개되는 혁명을 지지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정 반대였다! 지난주 하마스 경찰은 이집트의 혁명적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가자시에서 열린 작은 집회를 진압하고 몇 명의 여성들을 체포했다.

하마스는 이집트 혁명의 전개를 이스라엘 정부와 마찬가지로 염려한다. 이집트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쪽의 이집트-가자 국경지대에 보안부대가 추가 배치되었다. 실상은 이러하다. 하마스는 이집트의 운동이 가자 지구로 번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슬람주의적 봉기일 따름이라는 비난에 대한 응답을 찾고자 한다면 누구든지 그저 하마스의 반응을 보기만 하면 된다.

하마스가 이집트로부터의 감염을 두려워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다. 가자지구에 있는 수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2월 4일 금요일에 하마스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자고 주장하는 페이스북 그룹에 모여들었다는 사실은 가자지구의 분위기를 시사한다. 이는 가자에서 오직 이슬람주의적 반응만을 보는 모든 회의주의자들에 대한 응답이다. 이 작은 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진정한 목소리가 이제 드높아지고 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웨스트 뱅크에서 조성되고 있다. 실제로 웨스트 뱅크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시위가 팔레스타인 영토에도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곳의 경찰들도 하마스와 똑같은 우려를 하고 있다. 2011년 2월 5일 팔레스타인 라말라(Ramallah)에서 있었던 ‘이집트 혁명 연대의 날’ 동영상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경찰이 웨스트 뱅크의 라말라에서 이집트 혁명에 연대하는 집회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웨스트 뱅크에서 시위가 터질까봐 두려워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최근 유출된 팔레스타인 보고서가 PLO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지도부와 이스라엘 사이에 은밀한 공모가 있었음을, 심지어 팔레스타인 투사에 대한 암살을 논의했다는 것을 폭로한 것이 바로 최근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불안을 두려워하고 일체의 저항 운동의 싹을 자르고자 애쓰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상인 살람 파야드(Salam Fayyad)는 빠른 시일 내에 지자체 선거를 치를 것이라 공표했고, 총선거도 논의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대통령인 마무드 아바스(Mahmoud Abbas)는 무바라크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데, 만약 무바라크가 퇴진한다면 이는 팔레스타인 국민들 사이에서 그의 입지에 커다란 손상을 줄 것이다.

또 하나의 인티파다를 위한 모든 조건들이 팔레스타인에서 태동하고 있다. 새로운 인티파다는 고립된 봉기가 아닌 전 아랍 운동의 부분으로서, 훨씬 더 큰 규모로 일어날 것이다. 인티파다가 이스라엘 사회에 가한 충격이 수십년에 걸쳐 일어난 개별적 테러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스라엘의 노동계급 이웃을 타격하는 몇 발의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버스, 수퍼마켓에서 무고한 이스라엘 남성, 여성, 어린이들을 죽이는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 것은 시오니즘적 국가 기계의 한 터럭도 건드리지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인간으로서 위협받는다고 느낌으로써 전체 인구가 자신들의 정부를 지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시오니즘 국가를 강화하는 데 복무해왔다.

더구나 모든 아랍의 체제들이 전제적 독재정권이고, 아랍 민중들의 고통을 이스라엘의 탓으로 돌리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항상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게끔 이용해왔다는 사실은 또한 시오니스트 엘리트들에 의해서도 교묘하게 다음과 같이 이용되어 왔다. 즉 그들이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나라를 파괴하고 싶어하는 국가들에 의해 둘러싸여있는 나라로 그릴 수 있도록 말이다. 아랍의 노동자 및 청년들의 혁명적 운동은 어떤 지점에서 이스라엘에 있는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틀림없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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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공간 L 옮김


알랭 뚜랭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에헤스(EHESS)의 연구책임자이다. 여러 저작을 집필했는데, 그 중에 행동의 사회학(ociologie de l'action, Poche, 1965), 더 최근의 것으로 위기 이후(Après la crise, Seuil, 2010)가 있다. 무바라크의 퇴진 등 이미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를 고려해 게재한다.
출처:
http://www.lemondedesreligions.fr/actualite/alain-touraine-l-egypte-va-t-elle-se-turquiser-02-02-2011-1149_118.php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9월의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이후에 이집트인들은 무바라크에게 저주를이라고 외쳤습니다. 이집트의 대통령이 권력의 꼭대기에 머물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요?

벤 알리의 침묵, 무력함과는 달리 무바라크는 거만하고 강하게 대응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죽는다는 이 운명적인 예언은 가장 대담한 예언자들도 무색하게 합니다. 무바라크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봇물처럼 터진 민주적열풍을 봉쇄하기 위해서 깜짝 놀란 우리의 면전에서 아랍-회교 국가들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군정이든 민정이든, 위압적인 체제를 이렇게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운동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아무도 실제로 기대하려 하지 않았지만요! 그러나 피로 진압된 알제리의 봉기는 이 민주적 격동의 질주를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이 사회적 균열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왜 오늘에 와서야 터진 것일까요
?

50년 동안 전 세계는 냉전(1947-1991)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두 초강국에 의해서 찢겨져 있었지요. 소련은 쿠바와 같은 사회주의 위성국가들에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은 아랍의 위압적인 체제들을 모았습니다. 따라서 아랍의 몇몇 국가들이 회교 운동에 대항하는 성벽으로 등장한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회교 운동은 냉전 시기에 반이스라엘적이고 반미적인 세력으로서 결정화(結晶化)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성국가들의 경제적 상황이 이미 그 당시에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었다면, 그 상황은 양극화된 국제적 갈등에 종속된 것으로서 여과되어 이해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아랍의 몇몇 체제들이 자국의 인구를 빈곤하게 만들면서 부유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모로코와 알제리에도 항상 해당됩니다. 두 진영이 몰락하고 나서야 국제 정치가 그 나라들의 내부의 문제들에 다시 접목될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이 위성국이라는 불리는 나라들은 독자적인 상태가 되었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해야 했습니다
 

아랍 국가들이 양극화된 국제 정치를 따라서 자신들을 정의했다면, 왜 이 국가들은 그 이후에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는 새로운 갈등구도에 따라 정열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을 겁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 국가들은 이 새로운 양극화를 피했습니다. 경제적 경쟁이 이 두 초강국들 사이에 잔인하게 이루어지지만, 실제적인 충돌은 없습니다. 중국 자신이 내부 문제를 더 우선적으로 다루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양의 국가들은 별 이유 없이 아랍의 체제들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프랑스 정부는 근본주의자들을 막을 방패로서 벤 알리의 위압적인 체제를 지원했습니다. 그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인 튀니지인들에게 가한 사회경제적 억압은 하나도 신경을 안 쓰면서 말입니다. 우습게도, 회교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명목으로 위압적인 체제들을 지원한 것은 미국 국방성만이 아닙니다. 이라크에서의 부시의 실패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오바마의 난항은 회교도들을 사회적으로 약화시키는 부분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은 나치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더 이상 아니며, 지금부터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에 반대하는 국가일 뿐입니다. 또한 미국에 맞섬을 의미하는 것은 소련 진영이 아니라 이란 진영입니다. 국제적 대결의 구도 속에 있는 한 민주주의는 존재 근거를 가지지 못합니다. 개별적인 정치에 진입하면서부터 민주주의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튀니지에서 이집트까지 재스민 향기가 밴 공기가 예멘과 시리아 위에 불고 있습니다. 우리는 혁명이 아랍-회교 국가들을 휩쓰는 것을 목격할까요?

다행히도, 당분간은 아닐 것입니다. 1917년 프랑스*에서처럼 혁명은 정치적 힘에 의한 권력의 획득에 의존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1789년이나 1792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기가 일어난 아랍의 모든 나라들이 개별적 정치에 진입한다면 모두가 특이할 수밖에 없는 논리를 따를 것입니다. 다른 한편, 진정으로 혁명적인 것은 군사 권력도, 정치 정당도, 종교적인 운동들도 봉기의 주동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민중은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회교의 복귀를 피하는 것을 희망하게 마련입니다. 튀니지의 회교 정당인 엔나다(Ennahda) 당이 어제 인정받기를 요구했지만, 이는 이미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근대적이라 불리는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정치 체제를 아랍 국가들에 적절한 것으로 희망할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는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당들에 의하여 전송되는 민중의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를 지칭합니다. 싸다트(Anouar el-Sadate) 이후의 이집트에서처럼 아랍의 여러 국가들에는 다수의 정당들이 있지만, 이것으로는 민주주의를 구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서 알-가드(Al-Ghad) 당의 당수인 아이만 누르(Ayman Nour)2005년 선거에서 무바라크에 감히 대항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무바라크는 자신을 3년 동안 감옥에 가둔 자인데도요! 실질적인 문제는 이집트가 터키처럼 되느냐 혹은 아니면 터키가 이란처럼 되느냐입니다. 반서양 세력과 동일시하는 회교가서양의 회교도들이 이끄는 테러리스트 공격을 행할 정도로이러한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또 하나의 질문은, 진정한 민주적 모델을 믿을 수 있는 회교적 요소를 상상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입니다. 개신교가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민주주의의 출현을 지지했듯이, 우리는 회교라는 문화적 현실이 터키의 경우처럼 민주적 틀 속에서 정치적 표현을 발견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핵심적 문제는 회교가 내부적 정치동학의 심장부에 삽입되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과의 연관 속에서 정의되는 급진적 회교 체제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산층 혹은 민중의 운동이 중요합니다. 회교가 다양한 해결책들을 활용하는 것은 오직 이 가능성에서 출발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회교에 대한 성벽역할을 하는 나라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아랍의 위압적인 체제로 유희를 벌이는 서양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요?

나는 프랑스 정부의 어리석음에 대해 좀 유감입니다! 미셸 알리오-마리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튀니지에서 보내기 위해 벤 알리의 한 측근의 비행기를 탄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때에 그녀가 프랑스 시위진압경찰의 파견을 제안했다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꼴사납게 보입니다. 당사자가 외무장관이기에 이런 발언은 그녀를 정치 무대로부터 떠나게 할 정도로 심각한 정치적 실수입니다. 나는 거창하거나 조야한 말들을 쓰는 것을 삼갑니다. 나는 좋은 감정을 현실정치보다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꼴사나움입니다. 사회당은 더 명확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당의 습관은 아닙니다. 우리는 프랑스가 식민지를 가졌던 과거를 현재 용인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꾸치네르 식의 개입을 공개적으로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정치는 승리해야 하는 인간의 권리에 준거합니다. WTO에 의해 묶여지는 경제적 우애는 적과도 교역을 할 정도입니다. 눈을 딱 감고 있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탈식민적 관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요.


* "러시아"를 잘못 말하거나(뚜랭의 실수인 경우), 쓴(기록자의 실수인 경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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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1년 2월 7일 marxist.com에 실린 프레드 웨스턴(Fred Weton)의 글이다. 무바라크 퇴진 이전에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혁명이 중동 및 북아프리카 전역에 미칠 파급력을 거의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일이 지났지만 읽어볼만한 글이다. 2월 15일 현재 바레인, 이란, 시리아, 예멘, 알제리 등지에서 반정부시위와 정부의 유화정책 및 탄압이 복잡하게 뒤얽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어 이러한 시위의 배경과 전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원문의 분량이 많은 관계로, 2회 혹은 3회에 걸쳐 게재할 예정이다. -연구공간 L
출처:
http://www.marxist.com/egyptian-revolution-arab-world.htm

프레드 웨스턴(Fred Weston)/연구공간L 옮김

2011년 2월 7일 월요일

튀니지 봉기에 바로 뒤따라 일어난 이집트 혁명이 아랍 세계 전역에 충격파를 보냈다. 진지한 자본 전략가들 모두 이집트에서 전개된 사건의 “도미노 효과”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벤 알리가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로부터 한 주 전에 이코노미스트지는 벤 알리가 전복될 것이라거나, 혹은 그의 체제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조차 부인했다. 그리고나서 벤 알리가 축출되고 나자, 이들은 자신들의 독자들에게 튀니지 혁명이 이집트와 같은 국가들로 번지지 않을 것(이집트는 “다르기” 때문이다)이라고 안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오류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며칠 후 이집트가 폭발했다.

제국주의적 권력들, 특히 미국은 자신들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원 하에 있는 체제들은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부르주아지들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논평으로는 1월 28일자 파이낸셜 타임즈에 실린 한 기사를 들 수 있다. 부르주아들이 바로 최근까지만 해도 상황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다음의 글이 보여준다. “2007년까지 세계경제발전은 너무나 고요하고 예견 가능해서 때로 “매우 온건한” 시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목가적인 시기가 2008년 위기에 의해 갑자기 산산조각 났다. 중동에서의 이번 사건들은 훨씬 더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투자자들은 이제 정치적 ․ 경제적 의미에서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혹은 시장 용어로 말하면 중동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것은 ‘두꺼운 꼬리’*(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그것이 갑자기 엄청난 충격을 주며 발생할 때까지 간과되는 사건들)의 힘이다.” 이 기사는 HSBC 중동 분석가인 사이먼 윌리엄스(Simon Williams)를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튀니지에서 일어난 일은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중동에서의] 낡은 확실성들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소위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문제는 더 낮은 사회 층위에서, 억압받는 수백만의 노동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탐지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이 자신들의 상아탑 속에서 살아가는 탓에 이 층위를 통상 간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외관상의 고요함이 심지어 몇 십년 동안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현재의 상황이 늘상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저들이 극단적인 근시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맑스주의의 선견지명

반면 ‘역사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있고 모든 모순들을 고려하며 이 모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생각하는 맑스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 도구였다. 위 인용문이 보여주는 이해의 결여와 다음의 글을 비교해보라. “반동적 사우디 전제정권은 이제 한 가닥 실에 연명하고 있다. 이 부패한 깡패는 점점 더 지지를 잃고 있으며 권력에 매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앨런 우즈(Alan Woods), 2007년 12월 6일, 「중동, 아나폴리스, 팔레스타인 문제」). 2007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하라!

그렇다면 2008년 4월 7일 우리가 발행한 「이집트의 4월 6일 - 다가올 더 큰 사건을 위한 총연습」이라는 장 듀발(Jean Duval)과 프레드 웨스턴(Fred Weston)의 글은 어떠한가. “무바라크 체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노동자들이 체제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혁명을 위한 모든 조건이 무르익고 있다.”

더욱 최근인 10월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집트에서 긴장은 끓는 점까지 다다르고 있다. [...] 혁명이 수면 바로 아래에까지 차올랐다.” (아미드 알리자데, 프레드릭 오스턴, 「이집트: 점점 더 난폭해지고 있는 폭풍」, 2010년 10월 28일)

우리는 경제위기 및 점증하는 사회적 양극화와 뒤얽힌 수십년에 걸친 압제가 미치는 효과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혁명적 격변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 모든 것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중동 혁명의 전망을 제기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냉소주의와 회의주의의 귀가 찢어질 듯한 불협화음이었다. 이제 튀니지, 이집트에서 혁명이 터져나와 예멘, 요르단을 비롯한 많은 아랍 국가들에 혁명이 퍼지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미 제국주의와 그들의 서구유럽 동맹국들의 반응은 무바라크에게 자제를 촉구하고 보다 더 민주적인 체제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혁명이 점차 다른 나라들로 퍼져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썩어빠진 독재체제 전체가 무너질 것이 두려워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으로만 있던 그러한 사태를 그들은 이제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세계 ‘지도자’들이 이러한 결과를 촉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 편이 있다! 아랍 세계에서 핵심적 국가인 이집트가 만에 하나 튀니지와 같은 길을 가게 되어 무바라크가 결국 축출된다면, 그것은 벤 알리 퇴진을 낳은 사건들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미칠 것이다. 이집트 다음에는 요르단, 예멘, 알제리 등의 국가들 또한 모두 혁명적 격변기를 맞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이 지역의 강력한 물질적 이해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다.

따라서 오바마가 '이행'을 요구하고 있는 이면에서 다른 아랍의 지도자들이 무바라크로 하여금 저항하도록 부추겨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무바라크가 이 흐름을 저지할 수 있다면, 이 독재자들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 이스라엘 지배 계급 또한 이웃 집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이 스스로를 중동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적인 나라로 자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변국의 독재체제가 무너지게 되는 것을 썩 보고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들 지도자들이 걱정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 현존하는 것과 동일한 조건들이 모든 아랍 국가들 전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 아랍의 한 국가로부터 다른 국가로의 혁명의 전파는 모든 아랍 국가가 공통의 언어(아랍 국가들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자들과, 소수자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를 사용하고 공통의 문화유산과 종교(적어도 전인구의 90%가 믿는), 영토적 연속성(식민지배가 남긴 인위적 국경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모두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용이해진다. 이 모든 것이 대중들의 마음에 강력한 힘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동일한 원인은 동일한 효과를 가져온다. 모든 지역에 혁명의 기운이 가득차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전개될 사건들의 속도는 부분적으로 다가오는 며칠과 몇 주 동안 이집트에서 일어나는 일에 달려있다. 현재의 운동이 단기간 안에 무바라크를 거꾸러뜨리는 데 실패한다면, 이 과정의 속도는 느려질 것이다. 무바라크가 곧 퇴진하게 되면, 다른 곳에서 이 과정은 속도를 높일 것이다. 결과는 살아있는 힘들의 투쟁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누구도 이 과정이 앞으로 얼마나 빨라지고 혹은 얼마나 느려질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과정의 방향은 매우 분명하다. 조만간 무바라크는 물러나야 할 것이고 새로운 시기가 열릴 것이다. 그 때 이집트에서 계급투쟁은 높은 수준에까지 이를 것이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리고 이는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래에 서술한 간단한 상황 설명은 튀니지에 이은 이집트 혁명이 이미 미치고 있는 국제적 영향에 대한 암시이다.

요르단

요르단은 이집트의 길을 따를 1순위 후보이다. 점점 심각해지는 가난, 솟구치는 식료품 가격, 실업, 부패에 맞선 저항이 몇 주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인구 600만인 요르단에서 실업률은 공식적으로 14%이다. 인구의 70%가 30세 이하의 청년층이며 인구의 25%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수천명의 요르단 국민들이 수상 사임과 식료품 가격 인하를 요구하며 거리 시위에 쏟아져 나왔다. 이는 진행 중인 경제 위기의 결과이다. 요르단은 2011년 2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은 6.1퍼센트까지 올랐다.

대중들을 달래려는 시도로 압둘라 국왕은 몇 가지 ‘개혁들’을, 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선거법에 대한 개혁을 약속했다. 수상도 쌀, 설탕, 축사 및 가정용 가스 같은 생필품과 연료에 대하여 5억 5천만 달러의 보조금 신설을 공표했다. 또한 공무원과 보안 요원에 대한 임금 인상도 공표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로 인해 2월 1일 국왕 압둘라 2세는 사미르 리파이(Samir Rifai) 수상과 그의 내각 전체를 파면하고 마루프 바크히트(Maruf Bakhit)를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새 수상에게 “진정한 정치 개혁에 착수하기 위한 실질적이고 신속하며 가시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임무로 부과하겠다고도 덧붙였다. 국왕은 점점 불어나는 저항 운동에 영향을 미쳐서 이집트와 같은 각본으로 진행되는 것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왕은 즉각적인 민주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바크히트도 물러난 수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정부에 몸 담았던 2007년 지방 및 의회 선거에서 그는 감독관 직을 맡았는데 그 선거에서 극심한 선거 사기가 일어났다.

2월 4일 금요일 암만Amman의 수상공관 바깥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사실 이런 구호를 외쳤다. “정부는 물러가라” 이는 이들이 어떠한 미진한 조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군주정의 생존이 위협받을 것이며 체제 전체가 패퇴할 수도 있다.

예멘

인구의 45%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을 정도로 예멘에 광범위하게 퍼진 가난이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저항운동의 근간에 있다. 예멘에서 도착한 최신 뉴스는 2월 3일 목요일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지금까지 시위 중 최대 규모)이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사나(Sanaa)의 거리를 행진했다는 것이다.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반혁명적 친 살레 시위대와 대규모의 반 살레 시위대 사이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고 경찰에 의해 제지되었다. 아덴 시 남쪽에서는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데 최루가스와 실탄이 사용되었다. 이것이 이집트에서와 똑같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혁명 운동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다.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은 지난 수요일에 자신이 2013년 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아들도 후보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 또한 쫓겨나기 전 벤 알리가 선언했던 것과 흡사하고 이집트의 무바라크의 행위와는 거의 복사한 것처럼 똑같다. 그는 물러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대중들을 달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대중들을 거리에서 몰아내려는 책략일 따름이다.

그는 또한 임금 인상과 감세, 대학 졸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기금 마련, 사회보장범위의 확대, 다가오는 학기의 대학 수업료 면제 등을 공표했고 학비 감면을 [대학에] 요청했다.

이러한 약속들은 저항 운동이 점점 커져서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처럼 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책략임이 분명하다. 시위대들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목요일에 거리에 나선 2만 여명의 사람들은 “국민은 체제 변화를 원한다”, “부패 그만, 독재 그만”, “체제를 바꾸고 대통령은 물러나라”고 외쳤다.

알제리

튀니지에서 시위가 분출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인 12월 말에 알제리에서도 기본 식료품비의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2월 30일에는 수도 알제(Algiers)의 한 구역에서 열악한 주거 조건에 항의하는 시위를 경찰이 진압하는 와중에 53명이 부상당하고 29명이 체포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시위대의 반격이 얼마나 결연한 것이었는가는 53명의 부상자 중 52명이 보안요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월 초에 솟구치는 식료품비와 실업에 항의하는 폭동이 다시 일어났다. 체제는 거듭된 탄압 (5일에 걸친 거리 시위로 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8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과 물가 인하, 석유, 설탕 및 생필품 가격 인하, 재고비축을 위한 수백만 톤의 밀 구입으로 응답했고, 밀가루 같은 필수 식료품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대중들을 진정시키고 이제 막 전개되기 시작한 혁명의 고조를 멈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애초에 반란을 낳은 근본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실업, 특히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청년 층의 실업률은 여전히 높다. 정부에 따르면 청년 실업률이 10%이지만, 더 현실적인 조사에 의하면 거의 25%에 육박한다.

언제든 분출 할 때만 기다리면서 분노가 표면 바로 아래에서 오랫동안 부글부글 끓어 왔다. 예컨대 1월 22일 집회를 금지한 법에 맞서 알제에서 열린 친 민주주의 시위에서 경찰에게 공격당한 몇몇 시위대가 부상을 당했다. 수백명이 집회 금지를 거부하고 거리에 나섰지만 중무장한 경찰병력들에 맞닥뜨려야 했다.

2월 1일에는 티지 우주(Tizi Ouzou) 대학의 지역학생조정위원회(CLE)가 제안한 시위에 수 천명이 참여했다. 집회 주최측에 따르면 1만 5천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몇몇 시위 참가자들은 튀니지 깃발을 흔들었는데, 이는 알제리에서 부테플리카(Bouteflika)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운동이 일어나갈 바란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슬로건들 중 하나는 “부트-알리 물러나라!”였는데, 이는 부테플리카와 벤 알리를 섞은 언어유희이다.

2월 3일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알제리의 계엄상태가 “아주 가까운 시일 안에” 해제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계엄상태는 원래 1992년에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시행된 이래로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이 발표 후에 부테플리카는 내각 각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명백히 요구했고 또한 국영 TV와 라디오 방송이 모든 정당들의 관점을 방송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이것들은 단지 약속으로 남아있다. 이는 시위의 계기를 잠재우기 위한 말들이고 “민주주의적 개혁”이 궤도에 들어섰다는 것을 믿게끔 만들려는 말들이다. 비상계엄이 해제되는 정확한 시점은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일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오늘날과 같은 경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새로운 행동의 날이 2월 12일로 잡혔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시위는 알제리 국민들이 이웃 튀니지 국민들의 사례를 따라 중단없이 또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로코, 가자와 웨스트 뱅크, 시리아, 수단, 사우디 아라비아 등에 대한 분석 부분은 내일 게재 예정임.
...to be continued)

* 두꺼운 꼬리fat tail - 정규분포 상에서 값들의 분포가 평균 근처에서 두껍고 평균에서 멀어질수록 얇아지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좌우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분포 형태를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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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구공간 L